- 모던 불화' 개척자 안병문의 비극적 생애... 진실화해위 규명 거쳐 75년 만에 부활한 이름
[편집자 주] 필자는 이 기사의 주인공인 안병문 선생의 친손자이며, 본 기사는 필자 본인이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과 저서, 그리고 1938년 당시 언론 보도 등 1차 사료를 토대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1930~40년대 전통 불화의 격식을 지키면서도 서양식 원근법과 명암법을 받아들인 화가가 있었다. 이름은 안병문(安秉文), 화호(畵號)는 남산(南山). 승려가 아니면서 불화를 그린 '금어(金魚, 불화 제작을 총괄하는 장인)'였다.
그의 죽음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의한 사살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75년 가까이 역사 뒤편에 묻혀 있었다. 최근 친손자인 안재민 박사(전 선일빅데이터고등학교장)가 학술 논문과 저서로 삶의 궤적을 복원하면서,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와 불교 잡지에까지 남아 있던 그의 흔적이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
○ 마곡사의 다섯 살 신동, 열일곱에 나한상을 조성하다
안병문은 충남 공주 옥룡동을 거점으로 활동한 '재가(在家) 화승' — 절에 살지 않으면서 불화를 그리는 화가였다. 장녀 안숙자(1939년생) 여사의 구술에 따르면, 그는 다섯 살 무렵부터 인근 마곡사를 드나들며 그림을 익혔다. 신식 교육을 바라던 아버지도 끝내 그의 재능과 고집을 꺾지 못했다.
기록상 가장 이른 활동은 1934년, 열일곱 나이에 공주 갑사 신흥암 불사에서 나한상 11위를 새로 만든 일이다. 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금용 일섭이 남긴 『연보(年譜)』로 확인된다. 안병문은 약효 금호 → 보응 문성 → 금용 일섭으로 이어지는 '계룡산 화파'의 3세대였다. 같은 계보의 금용 일섭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이름과 기술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과 달리, 안병문의 화맥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끊겼다.
○ "왜색 불교에 항거하라"... 1938년 조계사 대웅전, 붓으로 세운 자존심
안병문의 실력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료는 뜻밖에도 일제강점기 신문에 남아 있다. 1938년, 조선불교가 '태고사'라는 이름으로 총본산 건립운동을 벌였다. 표면적으로는 대웅전 신축 불사였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식으로 변질돼 가던 불교계에서 조선 불교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려 한 상징적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 후대 연구자들의 해석이다.
당시 조선일보(1938년 10월 23일 자)는 이 불사를 다루며, 후불탱화와 벽화를 해인사의 지송파, 송광사의 김일섭(금용 일섭), 그리고 공주의 승려 안병문 세 사람이 그렸다고 보도했다. 불교계 기관지 『불교(佛敎)』 신제17집(1938년 11월 발행)에 실린 '총본산건축보고'에도 안병문은 김일섭·지송파와 나란히 공동 화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 불사는 그해 7월 3일부터 8월 29일까지 이어졌다.
세 사람은 전통 구도와 채색법을 지키면서도 근대적 형식미를 섞어, 이른바 '3인 핵심 화사단' 체제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병문은 후불탱화 조성과 내부 단청, 불상 개금 등 핵심 작업을 직접 맡았다. 당시 조성된 조계사 대웅전 후불탱(석가불도)은 지금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돼 남아 있다. 20대 초반의 지방 화승이 전국구 불사의 핵심 화사로 이름을 올린 셈이다.
○ 비행기와 서커스를 그려 넣은 파격, '흥천사 감로도'
1939년 조성된 서울 흥천사 감로도는 안병문의 독창성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하단부에 비행기·탱크·전차·서커스 등 당시 경성의 실제 풍경을 담아 학계에서 '모던 불화'로 꾸준히 연구되고 있다. 화기에는 그가 전체 구성을 도맡았다는 뜻의 '출초비구 남산병문(出草比丘 南山秉文)'이 선명히 남아 있다.
이 밖에 진관사 괘불도(국가등록문화유산 제810호)는 1935년 금용 일섭이 총괄하고 안병문이 협업한 작품이다. 화기에는 그의 이름이 '병희(秉熙)'로 잘못 적혀 있었는데, 금용 일섭의 『연보』를 대조해 오기임이 밝혀졌다. 안양암 신중도(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9호)는 1936년 화가 김일차와 함께 그린 그림이며, 1945년경 그린 공주 충현서원 주자영정(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8호)은 그가 불화를 넘어 유교 초상화로까지 화폭을 넓혔음을 보여준다.
○ 75년 만에 열린 유족의 그림 창고... 불화가 아닌 안병문을 만나다
사찰 불화 외에, 그동안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채 유족들만 대를 이어 보관해 온 그림들이 있다.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된 이 유작들은, 불화가로만 알려졌던 안병문이 실은 시대와 가족, 사랑을 화폭에 담던 '창작 화가'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대장간'(1940년경)이다. 쇠를 벼리는 장인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세밀한 붓 터치와 명암 대비로 포착했다. 가족 구술에 따르면 이 작품은 당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 출품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이라면, 안병문이 사찰 담장 안에 머물지 않고 당대 화단의 공식 무대에까지 도전했던 야심 있는 화가였다는 뜻이 된다.

(그림=대장간, 1940년경 추정, 안병문 作 · 유족 소장 · 학계 최초 공개)
'앞마당의 아이들'(1943년경)은 전혀 다른 결의 그림이다. 뛰어노는 아이들과 가족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 전쟁과 격변의 시대 한복판에서도 지켜내고 싶었던 소소한 행복을 보여준다.

(그림=앞마당의 아이들, 1943년경 추정, 안병문 作 · 유족 소장 · 학계 최초 공개)
더 개인적인 작품도 있다. '삼 나비가 날아든 날'(1935년경)은 안병문이 아내에게 직접 헌정한 그림으로 전해진다. 사실적으로 그려낸 나비 세 마리에 부부의 사랑과 가정에 대한 애정을 담았다는 것이다. 붓끝으로 아내에게 마음을 전한 셈이다.
(그림=삼 나비가 날아든 날, 1935년경 추정, 안병문 作 · 유족 소장 · 학계 최초 공개)
1945년을 전후해서는 '호행도중(虎行道中)', '만촌도(晩村圖)', '화촌춘경(花村春耕)', '호춘(好春)', '무릉도원(武陵桃源)' 등 전통 산수화 계열의 작품도 다수 남겼다. 수묵담채와 선 중심의 필법을 유지하면서도, 화면 단순화와 명암 대비 등에서 근대적 감각이 배어 나온다는 평가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가 일본 근대 회화와도 접점이 있었다는 정황이다. 유족 소장품 중에는 일본인 화가가 직접 그려준 것으로 전해지는 미인도와 인물화, 그리고 『아방신수 미술연구회』, 『제2회 문부성 미술전람회 화첩』 같은 일본 미술 서적들이 남아 있다. 불화 중심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당대 미술의 흐름에 열려 있던 화가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다. 다만 이 유품들의 정확한 입수 경위는 아직 추가 검증이 필요한 부분으로, 향후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낙관 하나 없이 사라질 뻔했던 이 그림들은, 대부분 '남산(南山)'이라는 호나 '안병문(安秉文)'이라는 본명이 낙관으로 또렷이 남아 있어 진위 확인이 가능하다. 불화 속 화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안병문을 처음으로 보여주는 창(窓)인 셈이다.
○ 심부름값이 목숨이 될 줄은... 형기 만료 두 달 전, 총성이 그를 삼켰다
1948년 12월, 여순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일제 치안유지법을 본떠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사회주의자와 잠깐 스친 것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할 만큼 적용 범위가 넓어, 전국에 검거 선풍이 몰아치던 시절이었다.
순수 예술가로 살던 안병문의 삶도 이 혼란 속에서 흔들렸다. 그는 1949년 10월 12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죄목은 남로당 자금 전달 연루였으나, 실체는 사회주의자였던 사촌 형 안병두(2005년 건국포장 추서)의 부탁으로 돈 심부름을 한 번 해준 것에 불과했다는 게 유족 측 설명이다. 정작 안병문 본인은 정치와는 무관한, 그림밖에 모르던 화가였다.
장녀 안숙자 여사는 이렇게 기억한다. "아버지는 오직 세상을 그리는 붓밖에 모르시던 순수한 예술가이자 다정한 가장이셨다." "아무런 죄도 없는 아버지가 사촌 형님의 단순한 심부름을 해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느 날 갑자기 차가운 감옥에 갇히셨고, 출소를 고작 두 달 남겨둔 상황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셨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경은 안병문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과 '같은 명분' 아래 묶었다. 출소를 두 달여 앞둔 그해 7월 9일경, 그는 정식 재판 없이 공주시 상왕동 '왕촌 살구쟁이 골짜기'로 끌려가 사살, 암매장됐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25년 1월, 이 사건을 국가 권력에 의한 불법 사살로 공식 인정하고 유족에 대한 사과와 명예 복권을 권고했다. 75년 만에 국가 기관이 비극의 실체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규명 결정 이후에도 남겨진 과제는 있다. 발굴된 유해는 충북대 인류학연구소를 거쳐 세종시 추모의 집에 무연고 상태로 안치돼 있다. 정밀 DNA 감식이 이뤄져야 비로소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 유족은 2025년 4월,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현암리 선산에 시신 없이 이름만 새긴 허묘(虛墓)를 마련해 배우자 고 이정범 여사와 함께 봉안했다.
연좌제의 낙인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후속 조치와 함께, 한 예술가의 이름이 온전히 복권되고 끊어진 근현대 불교미술사의 한 페이지가 다시 이어질 때 — 이 가족에게 드리운 오랜 한(恨)도 비로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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